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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요약 and 리뷰 (2)

HI_BUSAN_KI 2020. 1. 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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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복잡한 인간사회에는 상상의 위계질서와 불공정한 차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위계질서의 도덕성이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더욱 심한 차별로 고통받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기 사회의 구성원들을 가상의 범주에 따라 분류하여 사회에 질서를 창조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예컨대 귀족과 평민과 노예, 백인과 흑인, 고대 로마의 귀족과 평민, 부자와 가난한 자 등이었다. 이런 범주는 어떤 사람을 법적이나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게 만듦으로써 수백만 명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조율했다.

 

물론 사회적 차별이 형성되는 데는 타고난 능력의 차이도 한몫하지만, 능력과 성격의 다양성은 보통 상상의 질서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재능에는 육성과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재능을 타고났더라도 그것을 키우고 닦고 훈련할 환경이 되지 않으면 재능은 잠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든 사람이 능력을 배양하고 가다듬을 기회를 동등하게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기회의 소유 여부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상의 위계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달려있다. 둘째,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정확히 같은 능력을 개발했더라도 이들이 똑같이 성공할 가능성은 적다. 사회적 계층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똑같은 상업적 통찰력을 개발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이들이 부자가 될 확률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경제라는 게임은 제약과 비공식적인 유리천장으로 조작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우리는 상상의 산물을 잔인하고 매우 현실적인 사회구조로 바꿔놓은 사건들, 조건들, 권력관계를 연구해야만 비로소 그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다.

 

가장 흔한 이론은 남자는 힘이 세기 때문에 밭갈기나 추수처럼 힘든 노동이 필요한 업무를 독점했고, 덕분에 식량생산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정치적 영향력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의 문제는 역사를 통틀어 여자는 육체적 노력이 거의 필요없는 직업에서 대체로 배제되어 왔으면서도 들일이나 수공예, 가사노동처럼 힘든 육체노동에 종사했다는 점이다. 만일 사회적 권력의 분할에 육체적 힘이나 지구력이 직접 관련되었다면 여자는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경우 육체적 힘과 사회적 권력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적나라한 신체적 능력만 중요했다면, 사피엔스는 먹이 사다리의 중간쯤에 존재했을 것이다. 우리가 최상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적, 사회적 기량 덕분이다. 따라서 우리 종 내의 권력 사다리도 폭력이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남자가 신체적 힘으로 여자를 강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안정적인 사회적 위계질서의 토대라고 믿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지난 세기를 거치면서 젠더의 역할은 커다란 혁명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회가 남녀에게 동등한 법적 지위와 정치적 권리, 경제적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젠더와 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을 완전히 다시 생각하고 있다. 

 

 

수렵채집인에게는 돈이 필요없었다. 각각의 무리는 고기, 약품, 샌들에서 주술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사냥하고 채집하고 만들었다. 다만 현지에 없는 희귀 물품인 조가비, 염료, 흑요석 등은 이방인에게서 구해야 했다. 이는 단순한 물물교환으로 가능했다. 농업혁명이 시작됐어도 이런 방식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와 왕국이 등장하고 수송 하부구조가 개선되자 전문화라는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는 제화공과 의사뿐만 아니라 목수, 사제, 군인, 법률가를 풀타임으로 고용했다. 어떤 마을이 정말로 품질 좋은 와인, 올리브오일, 도자기를 만드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면, 그 마을은 거의 전적으로 해당 상품만을 생산하고 필요한 다른 상품은 다른 정착지의 사람과 교역을 통해 얻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는 아주 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문가 사이의 물품 교환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회는 많은 수의 전문가를 연결하는 쉬운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돈을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비옥한 논을 쓸모없는 별보배고둥 껍데기 한 줌과 기꺼이 바꿀 사람이 대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왜 그것이 성공했을까? 자신들의 집단적 상상의 산물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그런 일을 하려 든다. 부유한 농부가 재산을 팔고 별보배고둥 껍데기 한 자루를 받아서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고 하자. 그는 그곳의 사람들이 별보배고둥 껍데기를 받고 기꺼이 쌀과 집과 밭을 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화폐란 상호신뢰 시스템의 일종이지만, 그저 그런 상호신뢰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것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상호신뢰 시스템이다. 이런 신뢰를 창조한 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관계의 매우 복잡하고 장기적인 네트워크다. 나는 왜 돈을 신뢰할까? 내 이웃들이 그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믿는 이유는 우리의 왕이 역시 그것을 믿고 그것을 세금으로 받기 때문이며, 우리의 사제가 역시 그것을 신뢰하며 십일조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맨 처음 화폐의 최초 버전이 만들어졌을 때는 사람들이 이런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내재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화폐'로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화폐로 알려진 수메르인의 보리 화폐가 대표적인데, 보리가 실질적 가치를 지닌다고 해도 이것을 그냥 하나의 생필품이 아니라 돈으로 사용하도록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화폐로 받아들이고 신뢰를 주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는데, 왜냐하면 보리에는 내재된 생물학적 가치가 있기 떄문이다. 즉 사람이 그것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리는 저장하거나 운반하기는 어려웠기에 화폐의 역사에서 진정한 돌파구가 생긴 것은 그 자체로는 내재적 가치가 없는 돈, 그렇지만 저장과 운반이 쉬운 돈을 사람들이 신뢰하게 되었을 때다. 그런 화폐는 기원전 3000~2000년 사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현한다. 바로 은으로 된 세겔이었다.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코드,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지난 5백 년간 가장 눈에 띄는 단 하나의 결정적 순간은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였다. 정확히 그때, 미국 과학자들은 앨런머고도 사막에 첫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그 순간 이후 인류는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킬 능력뿐만 아니라 역사를 끝장낼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전통 지식이었던 이슬림, 기독교, 불교, 유교는 세상에 알아야 할 중요한 모든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고 단언했다. 위대한 신들, 혹은 전능한 유일신, 혹은 과거의 현자들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혜가 있었고, 그것을 문자와 구전 전통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곡대의 문헌과 전통을 파고들어 적절하게 이해함으로써 지식을 얻었다. 성경이나 코란, 베다에 우주의 핵심 비밀이 빠져있다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가령 요크셔 농부가 거미가 어떻게 거미줄을 치는지 알고 싶었다면, 사제에게 물어보는 것은 무의미했다. 기독교 문헌 어디에도 이에 대한 답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뜻하진 않았다. 어쨌든 하느님은 거미가 어떻게 집을 짓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정보가 인간의 번영과 구원에 핵심이 되는 것이었다면, 하느님은 당연히 성경에 상세히 설명해놓으셨을 것이다.

 

1687년 아이작 뉴턴은 현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 틀림없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출간했따. 뉴턴은 운동과 변화의 일반이론을 제시했다. 뉴턴 이론의 위대한 점은 세 개의 매우 단순한 수학 법칙으로 떨어지는 사과에서부터 별똥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뉴턴의 법칙에 잘 들어맞지 않는 소수의 관찰 결과와 마주친 것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였고, 그런 관찰은 물리학의 새로운 혁명으로 이어졌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었다. 

 

1744년 스코트랜드의 장로교 목사인 알렉산더 웹스터와 로버트 월리스는 생명보험기금을 만들어 사망한 목사의 미망인과 고아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목사들이 얼마를 내야 기금에 돈이 충분히 모여서 약속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지 알려면, 웹스터와 월리스는 매년 얼마나 많은 목사가 죽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미망인과 고아가 남을 것이며 미망인은 남편보다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 예측할 수 있어야 했다. 스코틀랜드인답게 실용적이었던 이들은 에든버러 대학의 수학 교수인 콜린 매클로린과 만났다. 세 사람은 사람들의 사망 연령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어떤 해에 얼마나 많은 목사가 사망할지를 계산했다. 또한 미망인이 죽거나 재혼하는 데 몇 해가 걸릴 것인가까지도 계산했다. 이 수치를 통해 웹스터와 월리스는 기금에 가입한 목사들이 얼마를 내야 아내나 자식들의 생활비를 보장할 수 있을지 결정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작업은 통계와 확률 분야에 토대를 두었다. 두 목사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확률 계산은 연금과 보험산업의 핵심이 되는 보험통계학뿐 아니라 인구통계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인구 통계학은 결국 찰스 다윈이 세운 진화론의 초석이 되었다. 

 

탱크에서 원자폭탄, 스파이 파리까지 군사기술에 대한 집착은 놀라울 정도로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군사 분야의 혁명은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조직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과학과 산업과 군사기술은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서로 얽히기 시작했고, 일단 그 관계가 정립되자 세상은 급속히 변했다.